어디에서도 힘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의욕의 탈수 상태.
누구에게나 마른 북어마냥 의욕이 바싹 말라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태릉선수촌 생활 초기, 나 역시 그런 순간과 마주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고 일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체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다. 그러니 내 의욕과 의지가 바닥을 쳤던 그때는 한마디로 유도를 그만두기 딱 좋을 때였다. 가뜩이나 체력도 기술도 남보다 부족한데 의욕까지 사라지다니, 태릉선수촌에서는 죽으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누군가 딱 한 명만 그만두라고 말해주면 옳다구나 싶어서 그만둘 것만 같았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불편한 확신.
지금보다 더 늦어지면 영영 돌이킬 수 없겠다는 어두운 불안감.
나에게 남은 건 그렇게 초라한 마음뿐이었다.
내 소식을 들은 친척 누나가 책을 몇 권 선물해주었다. 책을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 틈틈이 읽었다. 책에서 큰 위안이나 동력을 얻은 건 아니었다. 그나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책을 통해 알게 된 타우린과 달팽이즙, 과일즙 등을 많이 시켜 먹었다는 것 정도다. 입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그렇게라도 하면 똑같이 선수촌 밥을 먹는 선수들보다 0.0001퍼센트라도 체력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건강식품을 사 먹었던 회사는 고객 관리가 철저해서 한두 달에 한 번쯤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제품을 권하곤 했다. 통상적인 마케팅이다. 나는 그 전화를 받으면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시키곤 했다. 일이 년쯤 지나자 담당자가 바뀌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새로운 담당자는 왠지 긍정적인 기운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에서부터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 통화는 “잘 드시고 계세요? 신제품이 나왔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라며 제품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 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새로운 담당자는 주소지가 태릉선수촌인 것이 신기했는지, 조심스럽게 “혹시 국가대표세요?”라고 물어왔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선수촌 생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그 뒤로는 제품 이야기보다 내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지, 가족에게도 하지 못했던 푸념부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질책과 한탄까지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분은 태릉선수촌이 어떤 곳인지 세세하게 알지 못했고, 그곳에서 내 위치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래서 나와 가까운 그 누구보다도 무조건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내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너무 걱정 말아요. 잘할 거예요.”
아주 뻔한 응원이지만, 그때 나는 정말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다시 품게 되었다. 그분에게는 고객 관리 차원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바싹 마른 땅에 내린 단비같이 달콤한 응원이었다. 그분이 들려준 응원보다 내가 그분에게 털어놓았던 솔직한 이야기들이 더 도움이 되었던 것도 같다. 이전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던 응어리를 풀어내고 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힘이 생겼다. 그분과의 통화가 그 시절 내게 동아줄같이 느껴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이 흐르고 올림픽에 나가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그분에게 전할 수 있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후에는 그 회사의 사보(社報) 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나는 흔쾌히 응했고 출연료로 받은 제품 다섯 박스를 그분께 드리는 것으로 작게나마 고마움을 전했다.
낯선 이에게 예상치 못한 응원을 받기도 했지만, 살면서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들은 바로 가족이다. 나와 같은 운동선수들은 대개 가족이 함께 그 꿈을 꾸기 마련이다. 돈도 많이 들어가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일상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곤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꿈과 목표가 온 가족의 꿈과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어느 순간, 내 꿈은 더 이상 나만의 목표가 아니라 온 가족의 염원이 되어 있었고 내 경기 결과에 따라 집안 공기가 달라지곤 했다. 꿈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고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는 더욱 명확하고 절실해졌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따뜻한 이름이 가끔은 버거울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응원을 받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가끔은 응원 덕분에 내 한계치를 초월한 힘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응원의 시간이 길어지면 응원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조금은 지치기 마련이다. 더욱이 응원에 보답하는 성장을 하지 못할 때는 도리어 응원이 나를 짓누르는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만 잘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고 내가 잘해야 모두가 편안할 수 있는 상황. 결국 모든 것이 내게 달려 있다는 사실에 가끔은 숨이 막혔다.
“내가 잘되는 것만 빼곤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차마 말로는 꺼내지 못한 마음을 꾹꾹 눌러 삼킬 때면 입에서 쓴맛이 진동했다.
부산에서 유도 형제로 유명했던 나와 준현이가 대학교에 입학한 뒤 전국구 선수들 사이에서 실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알다시피, 물론 나를 모르는 채로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준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유도를 해온 내 쌍둥이 동생이다.) 경기에 나갔다 하면 예선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제대로 경기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그때, 패배만큼 힘들었던 것은 경기장에 응원 오신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기에 지고 온 날 저녁이면 아무도 주지 않은 눈칫밥을 혼자 먹고는 체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준현이와 나는 컨디션이 안 좋으면 같이 안 좋고 회복되는 시기도 비슷했다. (눈칫밥을 나눠 먹는 동료가 집에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동안 저조한 컨디션과 그만큼 저조한 성적이 이어지던 와중에 또다시 경기에 나가야 되는 날이 찾아왔다. 그날도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나와 준현이는 부모님께 이번 경기는 보러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라고, 아예 예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고, 헛걸음만 하시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머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잘하는 모습, 시상대 위에 서는 모습을 보러 가는 게 아니야. 유도하는 거 보러 가는 거지.”
그 말에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부모님은 늘 그랬다. 우리가 경기에 이겼을 때도 “잘했다”가 아니라 “수고했다”고 해주셨고, 졌을 때도 역시 “수고했다”라고 등을 토닥여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잘했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어떻게든 이기려고 기를 쓰는 선수가 아니라 “수고했다”는 말을 듣기 위해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로 자랄 수 있었다. 내가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목에 걸어 왔을 때도 부모님은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해주셨다.
“준호야, 정말 수고했다.”
내가 힘들거나 괴로울 때,
내가 싫고 미울 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
자신에게 “그래도 수고했다, 짜샤”라고 말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부모님께 받아온 묵묵한 응원 덕분이었다.
「잘 넘어지는 연습」 - 조준호 작가